《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노량해전이 서울 노량진? 영등포는 왜나오나?
한산도가 한반도?
아래 실록을 보면 서해에 이르지 못한다고
나옵니다.
고향 어르신들께서 오포에 다섯포구가 있어
바다로 나가셨다했으며 그래서 지명이 오포라하였다.
한반도는 그시대 조선이라는 지명
기자도등 다양한 별칭이 존재했다.
중국황족이 지금의 한국인 서세동점시기에
한반도 와 만주에 이주시켜 역사를 편집해 이식시키고 황족들을 이용해
일본이 식민지 건설을 자행한것입니다.
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1일 기유 4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원균과 이순신이 한산도·당포에서 승전한 일에 대한 기록
7월 6일에 순신이 억기와 노량에서 회합하였는데, 원균은 파선(破船) 7척을 수리하느라 먼저 와 정박하고 있었다. 적선 70여 척이 영등포(永登浦)에서 견내량(見乃粱)으로 옮겨 정박하였다는 것을 들었다.
선조실록 39권, 선조 26년 6월 29일 임자 9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경략 접반사 윤근수가 경략이 병부에 올린 게첩을 보고하다
일본의 대마도 등 여러 섬들은 조선의 동남쪽 모퉁이에 편재(偏在)되어 부산진과 더불어 바로 대치하고 있어서 왜선은 다만 부산진에만 올 수 있고 전라도를 지나 서해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선조실록 39권, 선조 26년 6월 29일 임자 9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경략 접반사 윤근수가 경략이 병부에 올린 게첩을 보고하다
지금 왜적을 초토하지 않는 것은 비유하자면 종기를 째서 고름을 뽑았으나 남은 독기는 여전하고, 또한 풀을 베어 제거하였으나 싹은 아직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물며 적의 사절이 했다고 하는 말을 항복한 왜인을 통하여 살펴 보니, 관백은 실로 조선에 도읍을 정하고 내지를 엿볼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려 했다 하며, 만일 조선을 얻으면 통공(通貢)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면서 평수가(平秀嘉)와 평행장(平行長) 등이 마음대로 왕경을 떠난 죄를 깊이 책하였다고 합니다. 이로써 관백의 야심(野心)은 뚜렷이 밝혀졌는데, 어찌하여 신중히 생각하지도 않고 갑자기 철병을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왜인이 군사를 늦추는 계책으로 우리를 꾀고 바쁘게 명을 따르는 계책으로 우리를 피곤하게 하며, 겸손한 말로 약속을 청하는 계책으로 우리를 어리석게 해 놓고 우리 군사가 철수(撤收)하여 내지로 깊숙이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돌연히 다시 침범한다면 조선은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요, 우리 병졸도 다시 돌이키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왕경·개성·평양·함경·황해 등 여러 곳은 왜적이 수고로이 힘을 쓰지 않아도 모두 그들의 소유가 되어, 조선을 다시 잃게 되고, 전공은 모두 헛고생이 될 것이니, 우리들은 장차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06029_009
조선은 주 와 군이 300개 일본은 8도 66주
https://story.kakao.com/mepssi/HJAmRisTmX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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