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문자를 창조했다면 ㄱ ㄴ ㄷ ㄹ..등의
의미 해석이 왜없는가?
의미도 없이 문자를 창조할수있는가?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사성에 대해 어제를 남기신분은
세종이 아닌 세조대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 문자 창조 전부 식민지시대 만들어 놓은 가짜역사》
논리적으로 소리문자는 단군조선(商朝)이전부터 존재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또한 날조된 부분도 있으나 그 기록에
옛 사람이 만든 소리 글씨의 발음도 어물거리고 더듬더듬하여
발음을 규정했다고 정확히 기록하고있습니다.
즉
세종대왕 문자창조가 아닌
세조 ~ 솅종(성종)시대
소리글씨 발음을 표준화시켜
당시 의미 문자로 쓰이던
쳔자문 음을 바로 잡은것을
문자창조로 서세동점시기(식민지시기) 전부 날조하게됩니다.
세종은 문자를 창조한 인물이 아닙니다.
이세상 《언어=말》의 어원(etymology)은 정신《씨,입자,설입자,작은조각...혼,령..소리(솔=영혼)》이 하늘에서 내려짐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오늘날 조선말씨의 용어적 표현으로 어원을 풀이 하자면
그어지다(ㄱ)
느어지다(ㄴ)
드리어지다(ㄷ)
일해지다(ㄹ)
매지다(ㅁ)
부어지다(ㅂ)
서지다(ㅅ)
오지다(ㅇ)
주어지다(ㅈ)
처지다(ㅊ)
켜지다(ㅋ)
태어지다(ㅌ)
파지다(ㅍ)
해지다(ㅎ)
《조선왕조실록 》
세조실록 20권, 세조 6년 5월 28일 계묘 2번째기사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선왕(先王)께서 손수 지으신 책이요, 동국정운(東國正韻)·홍무정운(洪武正韻)도 모두 선왕께서 찬정(撰定)하신 책이요.
명태조 주원장의 명으로 만든 홍무정운까지도 조선의 선대임금께서 찬하셨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있습니다.
세종은 그시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선왕이
세종대왕은 당연히 아니겠습니다.
선왕은 옛시대
즉 선대임금을 말합니다.
위 내용의 홍무정운을 홍무정운 역훈이라 주장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원본 어디에도 홍무정운역훈 이라 적시되어 있지않습니다.
즉 이런 음운서는 무수히 많았습니다.
■《초학자회(初學字會)》■
단군조선 이전부터 존재한 조선의 소리 글씨로
천자문 음(音)을 규정해 놓은 책
세조실록 14권, 세조 4년 10월 15일 기사 1번째기사 1458년 명 천순(天順) 2년
승정원에 명하여 《초학자회》의 주를 다는 일을 마치게 하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지난번에 판서(判書) 최항(崔恒)과 참의(參議) 한계희(韓繼禧)가 언문(諺文)으로 《초학자회(初學字會)》의 주(註)를 달다가, 일이 끝나기 전에 두 사람이 모두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하였다.
지금 문신(文臣)들을 모아 하루 안에 그 일을 마치려고 하니, 문신을 속히 뽑아 나의 친교(親敎)를 듣게 하라."
하니, 동부승지(同副承旨) 이극감(李克堪)이 아뢰기를,
"무릇 일을 속히 하고자 하면 반드시 정(精)하지가 못합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언문(諺文)을 해득한 자 10여 명을 택하여 기일(期日)을 정하고 이를 시키면, 공력(功力)을 쉬 이룰 수 있고, 일도 또한 정(精)할 것입니다."
하니, 중추(中樞) 김구(金鉤)와 참의(參議) 이승소(李承召)에게 명하여 우보덕(右輔德) 최선복(崔善復) 등 12인을 거느리고 찬(撰)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14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己巳/傳于承政院曰: "頃者, 判書崔恒、參議韓繼禧以諺文註《初學字會》, 事未就而二人俱丁憂。 今欲聚文臣等, 一日內訖功, 其速選文臣, 聽予親敎。" 同副承旨李克堪啓: "凡事欲速則必不精。 臣意擇解諺文者十餘輩, 刻期爲之, 則功易就而事亦精矣。" 命中樞金鉤、參議李承召, 率右輔德崔善復等十二人撰之。
선조실록 165권, 선조 36년 8월 3일 병술 2번째기사 1603년 명 만력(萬曆) 31년
정원에 《병장설》·《역학계몽》 등의 서책을 올리게 하다
국역
원문
.원본 보기
정원에 전교하기를,
"사고(史庫)에서 올린 《병장설(兵將說)》 1건(件), 《역학계몽(易學啓蒙)》 2건, 《초학자회(初學字會)》 1건, 《진법(陣法)》 1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1건, 《역대병요(歷代兵要)》 3건, 《동국통감(東國通鑑)》 1건, 《동문선(東文選)》 1건을 대내(大內)에 들이라."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사고의 서책은 강화(江華)에서 운반하여 오는데, 《실록(實錄)》 1백 권이 먼저 올라왔고 그 나머지는 본부(本府)에 남아 있습니다. 하교하신 서책은 사관(史官)을 보내어 가져오게 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강화에 수직(守直)하는 사관이 있으니, 올려보내라고 하유하라."
하였다.
■한글창제설 조작은 사실 아래 내용을 날조한것입니다.
즉
조선 초기 중앙집권을 목적으로 기존 음운서를 취합해
전국 천자문의 음을 표준화시킨것입니다.■
세종실록 89권, 세종 22년 6월 26일 병신 2번째기사 1440년 명 정통(正統) 5년
주자소에 명하여 《국어》·《음의》를 펴내게 하다
경연(經筵)에 갈무리한 《국어(國語)》와 《음의(音義)》 한 본(本)이 매우 탈락(脫落)된 것이 많으므로 중국에 구하여 별본(別本)을 얻었으나, 궐하고 빠진 것이 오히려 많고 주해(註解)가 또한 소략(疏略)하였다. 일본(日本)에 구하여 또 상세한 것과 소략한 것 두 본(本), 《보음(補音)》 세 권을 얻어왔으나 역시 완전하지 못하였다. 이에 집현전(集賢殿)에 명하여 경연에 간직하고 있는 구본(舊本)을 주(主)로 삼고, 여러 본(本)을 참고하여 와류(訛謬)된 것은 바로잡고 탈락(脫落)된 것은 보충하고, 인하여 《음의(音義)》와 《보음(補音)》을 가지고 번란(煩亂)한 것은 깎아버리고 절목 절목 아래에 나누어 넣고, 그래도 완전하지 못한 것은 운서(韻書)를 가지고 보충하여, 드디어 주자소(鑄字所)에 명하여 인쇄하여 널리 펴내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8책 89권 35장 B면【국편영인본】 4책 296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어문학-어학(語學) / 출판-인쇄(印刷)
아래 링크의 실록의 대화 내용을 보아도 음을 규정하는
내용입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da_12602020_001#
문종실록 13권, 문종 2년 4월 4일 무진 5번째기사 1452년 명 경태(景泰) 3년
예조에서 진사의 시취 조건을 아뢰다
예조(禮曹)에서 진사(進士)의 시취 조건(試取條件)을 아뢰었다.
《동국정운(東國正韻)》은 이미 고금(古今)의 운서(韻書)를 참작하여 정한 것이므로 운(韻)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는 장애(障礙)가 없으니, 빌건대 《예부운(禮部韻)》과 같이 대략 주해(注解)를 내어서 거자(擧子)로 하여금 압운(押韻)하는 데 쓰도록 하소서.
■예부운(모황운)등..수많은 음운서가 존재하였습니다.
모든 옛 음운서는 소리글씨가 천자의 음을 규정하기 위해 기록되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편집된 가짜인 이유■
세조실록 16권, 세조 5년 4월 11일 임술 1번째기사 1459년 명 천순(天順) 3년
좌의정 강맹경·병조 판서 한명회 등과 주본의 절목을 의논하다
국역
원문
.원본 보기
임금이 강녕전(康寧殿)에 나아가서 좌의정(左議政) 강맹경(姜孟卿)·병조 판서(兵曹判書) 한명회(韓明澮)·좌찬성(左贊成) 황수신(黃守身)·우찬성(右贊成) 권남(權擥)·좌참찬(左參贊) 박중손(朴仲孫)·공조 판서(工曹判書) 이변(李邊)·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승손(李承孫)·예조 판서(禮曹判書) 홍윤성(洪允成)·이조 참판(吏曹參判) 조석문(曹錫文)·인수부 윤(仁壽府尹) 권지(權摯)·이조 참의(吏曹參議) 임효인(任孝仁)과 승지(承旨) 등을 인견(引見)하고 주본(奏本)의 절목(節目)을 의논하도록 하였다. 행 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 김하(金何)와 도승지(都承旨) 윤자운(尹子雲)에게 명하여 태평관(太平館)에 가서 명(明)나라 사신을 청하여 오도록 하고는 임금이 근정문(勤政門) 밖에 나아가서 서로 읍(揖)하고 인도하여 사정전(思政殿)에 들어와 앉아서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술잔을 돌리고 영응 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의창군(義昌君) 이공(李玒)·익현군(翼現君) 이관(李璭)·강맹경(姜孟卿)·한명회(韓明澮)·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홍달손(洪達孫)·병조 참판 김순(金淳) 등이 차례로 술잔을 돌렸다. 임금이 명하여 주본(奏本)의 초고(草稿)를 명(明)나라 사신에게 보이게 하니, 진가유(陳嘉猷)가 이를 읽고 두서너 자(字)를 고치면서 말하기를,
"중국 조정과는 일체(一體)이니, 감히 이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박원형(朴元亨)과 김하(金何)가 묻기를,
"본국(本國)의 사대 문서(事大文書)의 자체(字體)는 예로부터 모황운(毛晃韻)184) 을 사용하였는데, 이제 《홍무정운(洪武正韻)》185) 을 사용하려고 한다면 갑자기 고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진가유(陳嘉猷)가 말하기를,
"《홍무정운(洪武正韻)》은 현재 모두 통용(通用)하고 있는데, 자획(字劃)만 바르다면 비록 《홍무정운》이 아니라도 또한 무방(無妨)할 것입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책 16권 4장 A면【국편영인본】 7책 320면
【분류】
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어학(語學)
[註 184]
모황운(毛晃韻) : 송(宋)나라 강산(江山) 사람 모황(毛晃)이 지은 《증주예부운략(增注禮部韻略)》을 말함. 우리 나라에서 《홍무정운(洪武正韻)》이 들어오기 전까지 널리 통용한 운서(韻書)였음.
[註 185]
《홍무정운(洪武正韻)》 : 양(梁)나라 심약(沈約)의 제정(制定)으로부터 8백여년간 사용되어 온 사성(四聲)의 체계를 일체 북경(北京) 음운을 표준으로 하여 개칭한 책임
■홍무정운이 들어오기까지 모황운을 사용하였다고
주석을 달아놓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훈민정음 동국정운 홍무정운은 모두 선대임금 시절에 편찬되었다 기록되있기에 주원장 과 세종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논리는 가짜입니다 .■
조선글씨어원연구회
https://www.gelssi.com
최세진 선생의 훈몽자회는
초학자회의 후대 카피본입니다.
《홍무정운(洪武正韻)》 : 양(梁)나라 심약(沈約)의 제정(制定)으로부터 8백여년간 사용되어 온 사성(四聲)의 체계를 일체 북경(北京) 음운을 표준으로 하여 개칭한 책임
■홍무정운이 들어오기까지 모황운을 사용하였다고
주석을 달아놓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훈민정음 동국정운 홍무정운은 모두 선대임금 시절에 편찬되었다 기록되있기에 주원장 과 세종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논리는 가짜입니다 .■
조선글씨어원연구회
https://www.gelssi.com
****
최세진 선생의 훈몽자회는
초학자회의 후대 카피본입니다.***
홍무정운에도 ㄱㄴㄷ..또는 ABC. .가 적시되어 있어야 합니다.
기역은 천자문 장음표기 천자문 단음표기 즉 조선말씨는
격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ㄱ》은 군의 초성(ㄱ) 중성(ㅜ) 종성(ㄴ)중
초성에 가깝운 소리나하였으니
오늘날 《그》 에 가까운 소리입니다.
이것을 천자문 장음표기로 왜곡해 발음시킨것입니다.
국문을 진정 연구하시는 분이라면 논리적으로 문자가 후대에 창조될수없다는것은
당연히 알수있습니다.
Comments